'추억은 방울방울'은 70년대 일본의 평범한 가정이야기에서 출발한다.
27살의 타에코는 갑자기 등장한 12살짜리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추억을 하나하나 꺼내어본다.
그리고 어른이 된 자신의 모습과 계속 대조하면서 새로운 걸 깨달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여간 사랑스럽기만 하다.
타에코의 어린 시절에서는 사람들의 입가에 진한 주름이 없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동화같고 몽실몽실한 연극무대같은 분위기라면, 현실에서의 그녀는 입가와 눈에 진한 주름을 띄는, 시간 속에 차곡차곡 쌓인 부드러운 온정과 성숙함을 드러낸다.
이 작품을 보면서 사람들은 얘기한다. '마치 어렸을 적 내 앨범을 펼쳐놓은 것 같다'고.
나 또한 그랬다.
70년대의 일본의 모습은, 내가소년기를 보내었던 우리나라의90년대와 별 다를 게 없었다.
밀레니엄 베이비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 아가들은 이제 막 초등학교를 입학했을텐데..
같이 공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옛이야기처럼 바라볼까?
魔女の宅急便 - 03.海の見える街
그 유명한 파인애플 일화.
12살의 타에코는 정말이지 놀랍다.
어린 내가 저 상황에 놓여있었더라면, 정말 타에코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행동할 것 같았다.
첫째 언니가 파인애플을 자르는 동안기대감에 부풀어 즐거워하는 타에코.
한 입 베어물고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딱딱해"라는 어린아이다운 솔직한 한 마디로 모두의 입에서 파인애플에 대한 실망을 내뱉게 한다.
그래도 자신이 그렇게 졸라서 비싸게 사온 파인애플.
가족 중 누구보다도 일요일을기대하고 있었던 타에코.
끝까지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며 맛있다고 한숨쉬듯 말한다.
둘째언니가 맛있는 바나나를 먹으러 사라지자 한층 더 맛없게 느껴지는 딱딱한 파인애플을 씹는 타에코의우울한 표정이 역력하다. 귀여운 것ㅋㅋㅋ
정말 다카하타 감독의 리얼리즘은 대단하다.
초등학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모습.
우리 때랑 조금도 다르지 않다.
학교에서 먹는 우유는 어쩜 그렇게도 맛이 없는지~ 미적지근..한게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흰 우유는 잘 마시지만, 매일우유-학교 급식에 나왔음-는 못마신다.
선생님이 구석의 교탁에서 지켜보는 아이들만의 학급회의도 그리운 추억들 중 하나다.
저렇게 멀찌감치 서서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처음으로 한다는 말이...
'어떤 날씨가 제일 좋아?'
아오 귀여운 것들ㅠㅠ
이 누나도 흐린 날이 가장 좋단다♡
조금은부끄러우면서도 즐거운 한 때를 떠올리는 27살 타에코 역시 행동 하나하나가사실적이다.
시골에서 '잇꽃'을 따는 27살의 타에코.
어린 시절 시골에 갈 일이없었던 그녀는 전원생활이 너무도 즐거워보인다.
12살의 타에코가 엄마에게 시골에 가자고 조르는 얘기가 나온다.
타에코 : 시골에 가고 싶어!
엄마 : 시골..?
타에코 : 시골에 있는할머니댁이라던가~
엄마 : 할머니는 우리집에 계시잖니?
타에코 : 그럼 할아버지댁!
엄마 : 돌아가셨잖니.
어쩜 어릴 때 나랑 똑같은 말을.. 타에코..ㅠ_ㅠ
나도 시골이 없었는데...
한 5년 후면 나도 저런 곳에 갈 수 있을까?
작년에 백석대학교 면접을 보던 도중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뭔가요?"
'가장 좋아하는'이라는 수식어만큼 애매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좋아하는 작품들 중 하나를 꼽아서 대답했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추억은 방울방울'을 좋아합니다."
다시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다카하타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적인 섬세한 표현과 공감할 수 있는 서정적인 분위기, 그의 작품에 묻어나는 자연주의에 기초한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전원배경을 얘기했다.
그랬더니 교수님들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마주 보시더니 "그 작품은 싫어하는 사람들도 꽤 많던데..." 라고 하시는 거였다. 그 때는교수님의 그 말을 듣고조금 당황스러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카하타 감독의 작품은 늘 그런 평을 달고 있다. 따뜻하고 서정적인 일상 속에미화되어 생생하게 묻어나는 짙은일본적인색채와, 생태주의를 배경으로 현대 사회를 적나라하게 풍자하는 면이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말하는 정치적인 면 등의사상적인 충돌이 많아서작품성은 인정하면서도 거부감을 지울 수 없다는 평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공감하기 힘든 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내에서의 아픔을 그린 '반딧불의 묘'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작품을 보고 눈물을 보였지만, 그건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눈물이지, 결코 그 상황을 정당하게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실제 다카하타 감독은 좌파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한다. 그러나작품에서 그런 면이 심하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내가 둔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나로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작품의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잔잔하며, 완성도가 높고 결말 또한 깔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그런 면을 들추어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카하타는 애니메이터로서 선배이기도 하지만, 사상 면에서도 미야자키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그래서 함께 노조에 가입해 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
작품에서도 정치적인 상징으로 치부될 수 있는 요소를 찾아보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비난을 받을 정도의 색을 갖고 있나를 따진다면 그건 아니다. 그 두 콤비는 인간과 자연의 동화, 순수로의 회귀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주제를 표현한 방식이 다소사회주의적인 색을 띄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여기서 나는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극단적인 보수집안에서 자란 내가 그들의 작품을 보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왜일까. 나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색이 묻어나는 작품들을 많이 접해왔고,머릿 속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받아 탄탄하게 굳어진 필터가 작동하고 있어서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그들을 내 안에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좀 과할 정도로 걸러내어 왔다.
그 이유를 분명하게 하자면, 다른 좌파적인 작품들과 비교해봤을 때 그들의 작품과 가장 차이를 보이는 부분으로 '순수성'의 유무를 따질 수 있다. 현 공산주의자들은 변질된 공산주의를 포장하고 변명하느라 급급하다. 현실로 나타나는 공산주의는 변질될 수밖에 없고, 그들은 변질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과장된 말로써 깔아뭉개고 공산주의가 그런 부분에 있어서 어떤 이점이 있는지 다소 왜곡된 비교분석으로 포장하려든다.
그건 일반적으로자본주의 사회의 룰 안에서 피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소수의 국민들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우리들의머릿 속에 공산주의의개념이 현실이라는 탄탄한 배경을 두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시선으로 보면 어떠한 훌륭한 작품도 굉장히 추악하게 보일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브리의 두 거장이 저런 이유로 비난을 받을 정도라면, 저 정도 쯤은 수위가 나와줘야 비교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순수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미야자키 감독이 가장 지적을 많이 받았던 점은 원령공주와 그 외 작품에서등장한 공동체 개념이었다. 모두가 똑같이 일하고 평등한 삶을 보장한다는 바탕이 공산주의의 개념과 닮아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 설정이다른 작품에서도 꼬리를 물고 계속 반복되니까'좌파의 색이 짙다'는비난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작품 세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른 한 면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와는 무관한 면이다. 그들은 모두 평등하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모두들 자신의 꿈을 갖고 있으며, 그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은 있으나 위에서 억압하는 세력은 없고, 행복한 웃음이 넘친다. 마치 그건 혹평가들의 말처럼 체계화된 공산주의 국가의 축소판 같은 모습이 아닌, 거대한 세계의 흐름에 빗겨나가자연과 더불어 사는 작은 소수 민족에 가깝다. 그의 세계관은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에 가까운데, 그것은 한 사회에 속해있는 모든 사람들이 순수함을 잃지 않아야 가능한 세계이다. 동화 속에 나오는어느평화로운 마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그런 순수한 세계를 꿈꾼다. 부패한 세상에 넌덜머리가 난 현대인들은 그런 탈출구를 갈구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토마스 모어가 주장한 이상향같은 곳은 결코 실현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쉬는 꿈의 세계이고,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런 사상적 바탕이 공산주의로 연결되는 것 같다.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볼 때, 사람은더불어 살기를 원하며, 지극히 단순한 시스템에서의 평등과 안정을 바라고 있으니까 말이다.
다카하타 감독의 헤이세이 너구리 전쟁 폼포코의 후반부를 보면,너구리들이 아파트촌이 되어버린곳의 예전 모습을 한 순간 재생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작고 아담한 집들은 풀숲과 논밭 사이에 한 폭의 풍경화처럼 하나 둘 띄엄띄엄 박혀있고, 농부들은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너구리와 다른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있는 장면이다. 다카하타 감독도 그 장면을 구상하면서 자신의 평화로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게 아닌가 싶다. 다카하타 감독의 사상 표현은 미야자키 감독과 약간의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세계관의 직접적인표출이 아닌 현대 사회를 향한 은근한 공격이다. 그의 작품들은 현실이 적일 때가 많다. 특히나 그의 리얼리즘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일조차 적나라하게 뒤집어, 온 몸에소름이 돋게 만든다. 그는 과학만능주의와 발전속도에급격하게 가속이 붙는 도시, 인간의 욕망 등을 질책한다. 표현방식은 달라도 미야자키 감독과 하고 싶은 말은 아마 같을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순수하게 살아가자.'
이는 위에 언급한 작품 외에도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미래소년 코난' 등에서도 짙게 묻어나는 주제이다. 하지만나는 그들의 세계관을 감히 '정치적인 색이 짙어 불편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세계는 현 공산주의나 사회주외와는 거의 무관한 인간의 본질과 동심으로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 '만화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꿈의 세계를 접하면서 어렸을 때 꾸었던 많은 환상을 상기하게 되는데, 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자연으로써의 치유를 일깨워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그들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보기좋게 포장된 좌파사상 따위가 아닌 '마음의 고향'이라는 걸, 작품에 몰입해 보았던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사람에게 있어서어릴 때의 꿈과 순수성을 잃지 않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마음가짐만은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걸 정치적인 색으로 판단해 비난을 퍼붓는다면, 그 사람은 순수성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시커멓고 커다란기계일 것이다.
'애니메이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NHK에 어서오세요.(NHKにようこそ) (0) | 2008.04.08 |
---|---|
블랙 라군(Black Lagoon) (0) | 2008.03.04 |
연말이라 음악 하나... (0) | 2007.12.30 |
카우보이 비밥 엔딩곡... (0) | 2007.09.09 |
오늘부터 마왕... (0) | 2007.09.09 |